다하우 강제 수용소(KZ-Gedenkstätte Dachau)는 나치 정권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강제 수용소로서 1933년 뮌헨 근교의 소도시인 다하우에 세워졌습니다. 이후 12년 간 반체제 인사와 전쟁포로, 유대인 등을 가두고 억압해 오다가 1945년 4월 마침내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어 현재는 희생자들을 추도하고 과오를 반성하기 위한 기념 시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 외에도 독일 국내를 비롯하여 나치 점령지 전역에 수많은 강제 수용소들이 존재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세워진 수용소이자 각종 매체에 많이 노출되어 대중에게 수용소의 참상을 알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기에 그 상징성이 더욱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뮌헨 시내에서 다하우로 가기 위해서는 S-Bahn을 이용하는 쪽이 편리합니다. 중앙역에서 S2를 타면 다하우까지 약 20~25분 가량이 걸리며, 만약 시간이 맞아서 뉘른베르크(Nürnberg) 방면으로 향하는 RB를 타실 수 있다면 소요시간을 절반 정도로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RB는 중간 정차역이 없고 배차간격이 1시간 정도로 길어서 중앙역 인근에서 출발하시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부러 이걸 타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하우역 앞 정류장에서는 수용소로 가는 726번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작고 조용한 동네인데도 수용소 방향으로 가는 수요가 많은지 무려 굴절버스를 투입하네요. 이 노선의 배차간격은 약 20분 정도이며 수용소까지는 약 10분 정도 소요됩니다. 다만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726번의 배차간격이 40분으로 벌어져서 다소 불편함을 느끼실 수도 있는데요, 대신 일요일과 공휴일에만 운행하는 744번 버스가 726번과 번갈아 가며 40분 간격으로 수용소까지 왕복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배차간격은 평일과 마찬가지로 약 20분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버스에 타시면 안내를 잘 보고 있다가 'KZ-Gedenkstätte' 정류장에서 내리면 됩니다. 사실 승객 대부분이 수용소로 가는 사람들이라 내릴 타이밍을 놓칠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여담이지만 안 그래도 좁은 길에 공사까지 하고 있어서 이걸 굴절버스로 어떻게 지나가나 했는데 기사님이 절묘한 운전 솜씨로 빠져나가는 걸 보고 승객들이 모두 박수를 치는 재미있는 경험까지 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맞은편에 이곳이 다하우 수용소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고 그 뒤로는 방문자 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안내 데스크와 카페테리아, 서점 등이 위치해 있는데요, 안내 데스크에서 오디오 가이드(3.5유로)를 빌릴 수 있지만 아쉽게도 한국어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다하우 수용소는 휴관일인 12월 24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관하며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보다 상세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방문자 센터를 지나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수용소의 유일한 출입구이자 본부 역할을 한 정문 건물(Jourhaus)이 보입니다. 모든 수용자들은 이 문을 거쳐서 수용소로 들어갔으며 수용소장의 집무실 등도 모두 이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 건물을 지칭하는 Jourhaus라는 단어의 어원이 궁금했는데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일직을 뜻하는 'Jourdienst'와 건물을 뜻하는 'Haus'의 합성어라고 하는군요.
정문을 등지고 수용소 앞쪽을 바라보면 당시 사용되던 철로와 플랫폼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열차로 실려온 수용자들은 이곳이 아닌 다하우역에 내려서 수용소까지 약 3km 정도를 걸어서 이동했고 이 선로는 공장에서 필요로 하거나 생산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더 앞쪽으로는 수용소를 관할하던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 이하 SS)의 주둔지와 훈련소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현재는 이 부지를 기동경찰(Bereitschaftspolizei)이 사용하고 있어서 더 이상 들어가볼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정문으로 돌아와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수용소 내부로 통하는 철문에 새겨진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나치 정권이 태동하기 전까지는 권면을 위한 전형적인 슬로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강제 수용소의 입구마다 (현실과는 모순된) 이 문구가 붙기 시작하면서 이는 나치의 만행을 상징하게 되어 현재도 금기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서 부헨발트(Buchenwald) 강제 수용소에 걸려있는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Jedem das Seine)"이라는 문구도 유명하구요.
그리고 철문 양 옆으로는 2차대전 당시 수용소를 해방한 미군 42사단과 이를 지원한 20기갑사단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 동판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실 42사단이 다하우 수용소에 남아있던 SS로부터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내긴 했지만 이와 거의 동시에 45사단도 다른 경로를 통해 수용소로 진입하였기에 누가 먼저 다하우 수용소를 해방하였는지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45사단도 이 자리에 함께 초청되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절했다고 하네요. 수용소의 해방과 관련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이 페이지를 참고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문을 지나 수용소 내부로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점호장(Appellplatz) 양 옆으로 수용자들이 사용하던 막사(Baracken)와 관리동(Wirtschaftsgebäude)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희는 우선 관리동부터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관리동의 내부에는 나치 정권이 수립된 배경에서부터 수용소의 시스템과 생활, 그리고 종전 후 처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규모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천천히 패널들을 훑어보며 관심이 가는 내용만 읽어봤는데도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수용자의 개인 사물함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수용자들이 사용했던 식기입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식기류는 항상 광택이 날 정도로 유지해야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다하우 수용소와 이에 접해있는 SS 주둔지의 모형입니다. 직사각형 모양의 구획 내부가 수용소이며 나머지 건물들은 SS의 병영이나 군수품 공장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해방의 순간. 이후 다하우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관련자들이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지만 냉전이 시작되고 재판 관할권이 서독 정부로 이관되면서 법률상의 허점이나 사면으로 인해 이들 중 다수는 결국 처벌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관리동의 뒤편에는 수용소 내부의 감옥으로 사용되던 벙커가 있습니다.
수용실 자체도 좁고 열악하지만 이마저도 내부를 다시 격벽으로 나누어서 수용자들이 아예 서 있어야만 했던 방도 있었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쇠약해진 수용자들이 이러한 학대를 당하면 폐인이 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했다고 하네요.
다시 점호장으로 나오니 관리동 앞에 있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조형물은 유고슬라비아의 조각가 난도르 글리드(Nandor Glid)가 제작했다고 하는데요, 해설에 따르면 이는 상징적인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철조망에 뛰어들어 자살한 수많은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반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관리동 맞은편으로는 수용자들이 생활하던 막사가 보입니다. 원래는 반대쪽 끝까지 총 34개의 막사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현재는 두 개 동만이 전시 목적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막사 내부에는 시기별로 조금씩 변화해 가는 수용자들의 주거공간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그래도 버틸 만 하겠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설명에 따르면 항상 정원보다 훨씬 많은 인원으로 인해 개인 공간이나 위생 상태가 매우 열악했으며 현재 전시 중인 가구나 사진들도 대부분 나치의 선전물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수용소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보다 현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전시관 재설계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수용자들이 사용하던 화장실과 세면실입니다.
원래는 여기에도 전부 막사들이 들어서 있었겠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수용소 부지 끝편에는 각 종교별 추도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먼저 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1960년에 수용소 부지 내에 처음 세워진 종교시설이자 천주교 예배당인 'The Mortal Agony of Christ Chapel'입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가르멜회 수녀원(Carmelite Convent)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의 입구는 원래 수용자들을 감시하던 감시탑을 개조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주교 예배당의 오른쪽에는 독특하면서도 엄숙한 양식으로 지어진 유대교의 추도시설이 있구요,
왼쪽으로는 개신교 교회(Protestant Church of Reconciliation)가 자리해 있습니다.
가스실과 소각로가 위치한 화장장(Krematorium)은 수용소 부지 구석에 있는 출입구 바깥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쪽으로 출입구가 나 있지 않고 주변이 모두 해자와 전기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에 화장장으로 갈 때에도 항상 정문을 통해서 다녀야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앞서 말씀 드렸던 대로 수용자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이러한 전기철조망에 뛰어들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는군요.
화장장으로 가는 길 옆으로는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당도 있습니다.
'Baracke X'라 불리던 화장장 건물입니다. 다하우 수용소에는 이전부터 사용되던 작은 화장시설이 있었으나 사망자가 증가하면서 처리 능력이 한계에 이르러 새롭게 이 화장장을 건설하였으며 1943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지은 화장장도 1944년 말경에는 포화상태에 도달하여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할 시점에는 미처 화장하지 못한 시체들이 셀 수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이 악명 높은 가스실의 입구입니다. 샤워장으로 위장하기 위해 문 위에는 샤워를 뜻하는 'Brausebad'라는 표시를 해 두었는데요, 가스실과 얽힌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현재 일상적인 독일어 회화에서는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가스실의 내부는 이런 모습입니다. 사실 이 가스실이 실제로 사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당시의 여러 증언이나 조사 보고서가 서로 엇갈린 의견을 제시하여 현재까지도 명확히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동안은 가스실에 설치되어 있던 안내문에서조차 이 가스실이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었으나 현재 이 안내문은 제거되었으며 실험 및 훈련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다하우의 이 가스실이 대량 학살에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많은 수의 수용자들이 오스트리아 하트하임(Hartheim)의 안락사 센터로 끌려가 그곳의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반인륜적인 범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샤워장으로 위장된 가스실 옆에는 보다 작은 4개의 가스실이 나란히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가스실은 티푸스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수용자들의 의류를 소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여기는 새 화장장이 건설되기 전에 사용되던 보다 작은 규모의 화장장입니다. 이곳의 소각로는 한번에 두 구의 시신을 화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나 실제로는 공간이 허락하는 대로 집어넣고 한꺼번에 소각한 후 그 재는 주변 밭의 비료로 사용하기까지 했다는군요. 이러한 화장시설이 수용자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수용소 부지와는 격리된 곳에 설치하고 나무로 가려두었지만 시신을 태우는 냄새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